태권도역사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태권도역사

태권도역사

고대 한반도의 부족국가들에게는 제례 의식으로서 가무, 유희 등이 존재했는데 이와 같은 몸짓들이 대결 구도로 잡히면서 축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본다.
즉 원시적인 형태의 스포츠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술이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무술과 진전 제례 행사로서의 목적이 융합되면서 한민족 고유의 무술 태권도의 원형이 갖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태권도에 관한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는 많은 편이다. 특히 고대의 고분 벽화나 불상, 서적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분 벽화 중의 하나로,AD 209~AD 427년,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재 만주 집안현 통구에 있는 무용총 현실 벽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벽화에는 두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손•발로 상대를 공격할 듯한 자세를 보여 오늘날의 태권도 경기 동작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나 분황파 9층석탑의 인왕상 등의 몸 동작은 태권도의 품과 유사하다.
또한, 백제의 경우,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 조정에서의 백제의 대좌평 지적을 초청해 일본 건아들과 상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선진문화권인 백제인들이 맨손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고려에 와서는 삼국시대에 행해지던 택견(태권도)이 체계화된 무예로서 무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고려사』에 보면 태권도가 '수박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을 여러 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하므로 의종 임금은 이를 사랑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임금이 화비궁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박희(태권도)는 무예로서뿐만 아니라 스포츠로서 제 삼자가 관람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서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근세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와 비슷하게 무인들 사이에 수박희(태권도)가 계속 성행했다. 더욱이 대중화된 경기가 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하게 되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지 마을에서 양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서 승부를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수박희는 무예로서만이 아니라 스포츠로서도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태종실록』권 19에 보면 "병조의 의홍부에서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 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군사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록 하고 구경했다."(『태종실록』권32)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박희는 실전에서도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서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지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 후 잊힌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 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하에 전 세계로 진출한 태권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태권도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Copyright © tkdheadquarters.com All rights reserved.